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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조소앙 자작 컬러복원

    목차











 1887.5.2 - 1958.9.10


1902년 상경하여 성균관에 입학, 그곳에서 신채호를 만나 황무지 개척권 양도에 반대하는 성토문을 작성함


1904년 일본 도쿄 부립 제일 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한국학생들은 열등하다는 교장 선생의 발언에

유학생들과 동맹하여 저항하였다.


1910년 일제 합방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이에 감시 요주의 대상으로 올라

곤욕을 치루었다.


차후 상해로 떠나 임시정부의 수립을 참여하였으며 프랑스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베르그송, 

러시아의 레닌과 영국의 노동당 맥도널드 의원과 함께 담소를 나누었다.


1926년 임시정부의 외무총장, 학무총장을 연임하며 이때 삼균주의에 기초하여

정치의 균등화, 경제의 균등화, 교육의 균등화를 기초로 한 태극기 민족혁명론을 발표하였으며

단군의 독립 사상, 석가의 자비제중, 공자의 충서일관, 소크라테스의 지덕합치, 예수 그리스도의 애인여기

무함마드의 신행필용을 두루 본받자는 취지의 종교와 사상의 융화, 융합을 추진하였다.


만주사변 이후, 쑨원의 아들 쑨커가 "왜 한국 사람들은 뭉치지 못하는가?" 에 대한 조소에

"한국 사람이 위대한 것이다. 한 사람 혼자서 천하를 영도해 나아가는 것은

한국 사람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일이니 중국 사람이 모방할 만한 일이 아닌가?" 라며 반박하였다.


1941년 한국 광복군 창립식에 참여, 한국 광복군 포고문을 발표하여 대일본에 선전포고를 발표한다.


1942년 충칭에 주재하였던 미국 대사관의 고스 대사를 방문, 중국이 한국 임시정부를 쉽사리

승인하지 않는 이유는 일본이 패배한 후 한국을 다시금 자국의 종주권으로 넣을 속셈이라고 전하였다.

차후, 중국은 한국에 대해 제국주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으며 중국이 강요하려고 했던

제안들에 자신은 분개하여 차후 유사시에는 정부를 워싱턴으로 옮길 가능성이 있음을 전하고

동시에 인도에 휘하의 요인을 파견하며 이승만과도 연락을 취하였다.


1945년 귀국 후 송진우가 암살되자 테러 행위는 혼란의 근원일 뿐이라는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그와 동시에 신탁통치에 반대한다는 뜻을 내비치자 미군정에서는 김구, 신익희 등과 함께

이들을 소환하여 경고 조치를 하였고 이후 적극적인 신탁 반대의사를 표하지 않게 되었다.


1947년, 그리고 1948년에는 좌우합작 운동을 하던 중도파와 협력하여 정당 협의외흘 결성하였으나

각종 정치적인 문제로 좌절되었고 신익희와 김성수 등 주변이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구, 김규식과 함께 남북 협상 안건에 대하여 북한을 방문하였으나

김일성과 그 주위의 이들의 조소와 함께 북한 전역을 병참국가화 하려는 계획을 눈치채고

대한민국 단독정부 수립에 결국 찬성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김구, 김규식 등 주변 이들과 마찰을 빛고 대립하여 분열하게 되었다.


이 시기, 북한 정부는 조소앙의 주변에 쁘락치들을 심어 정보를 캐내고 그의 활동을 감시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하단에 작성한 대로 남한 정부에서는 조소앙을 공산주의자와 한패로 인식하여

그의 명예를 복원하는 것을 막게 되었다.


한국 전쟁 당시 납북된 후, 같이 뜻을 함께하던 이들이

반동분자로 낙인 찍힌 후 충격을 받아 단식 투쟁을 하던 중 끝내 순국하였다.


대한민국에서는 1970년까지 조소앙에 대하여 위에 언급한 대로

공산주의자라는 누명을 받아 언급을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유지되었으나

1989년 대한민국장이 추서됨으로써 누명이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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