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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5년 7월 14일 평안도 덕천군 무릉방 제남리 출생
(現 평안남도 덕천시 제남동)
1920년 11월 29일 경기도 경성부 서대문형무소 순국 (향년 65세)
(現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부모를 여의고 친누나 집에서 성장하였고,
친형에게 한학과 한의학을 익혀 생활의 방편으로 삼았지만,
전통적 학문으로는 개항 이후 점증하는 사회의 근대화 요구를 실현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개신교 장로회에 입교함
1883년
함경도 홍원현 읍내 남문 앞 중심지에서 한약방을 경영하여 상당한 재산을 모아
이를 기반으로 읍내에 사립학교와 교회를 세워 신학문을 전파하고 민족의식을 고취
1911년 봄
홍원군 용원면을 떠나 청나라 길림성 화룡현 두도구로 망명,
이후 연해주 일대를 방랑하면서
박은식, 이동휘, 계봉우 등 애국지사들과 만나 독립운동 방도를 모색함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강우규 역시 독립에 대한 희망을 갖고 그해 4월 신흥동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했으나
열강들이 독립을 승인하지 않자 위기감을 느끼고 5월 말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으로 이주함.
그곳에서 제 2대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사임하였으나 후임 총독이 임명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됨.
이에 요시미치 총독이 3.1 운동을 통하여 도저히 조선을 통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조선의 독립을 허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이 상황을 골칫거리로 여겨 모면하기 위해 단연 사직함에도 불구하고
후임 총독이 임명되었다는 것은 일제가 계속 통치를 이어나갈 것이며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며 이 자를 암살하여 국내외의 동정을 받아 조선의 독립의 정당성을 인정받고자 함
몇달 전 시베리아 웨리노 역에서 접선한 러시아 군인으로부터 영국식 수류탄에 대한 설명을 듣고
훗날을 위해 한 정 구매하여두었던 경험에서 수류탄을 이용해 신임 조선 총독을 처단하기로 계획함과 동시에
시베리아 부근에서 알고 지내던 최자남의 집에 머무르며 거사에 대해 알려준 후, 수류탄과 각종 화기들을
그가 이사할때마다 거주하던 집들에 숨겨 둠
이후 허형, 김종호, 한흥근, 윤희식 등의 도움을 받았고 경성으로 돌아가 신문을 통해 신임 조선 총독이 그 해 9월 2일에
부임한다는 기사를 접하게 됨.
9월 2일 거사 당일 오후 5시
남대문 정거장쪽에서 조선 총독 일행이 정비를 하던 찰나
신문에서 오려두었던 총독의 사진과 동일함을 확인하고 마차를 향해 수류탄을 투척함.
많은 요인들이 부상당했으나 암살 대상이던 사이토 총독은 허리춤에 찬 검집을 파괴하는것에 그침.
9월 17일
목격자를 제보받은 친일 경찰 김태석에 의해 체포 후 고문당함.
이후 아들에게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라는 말을 남김.
1920년 11월 29일
"단두대 위에 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이는구나.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겠는가"
라는 유언과 함께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함.
2011년 9월
구 서울역 광장에 강우규 의사 동상 건립 및
서울역 환승센터의 이름을 강우규 의거 터와 함께 병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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